불명(+)




발레와 권투.

상투적이지만 상반되는 두 예술을 가지고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졸업한 학교를 스쳐 지나가는 마음으로, 막연하지만 따뜻한, 그러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시절을요.

영현은 가진 게 투지와 열정 밖에 없던 무명의 권투 선수 시절을 지나,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결국 망가진 글러브를 끼고 있던 사람입니다. 제가 가진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달렸던 이에요.

은재는 가진 게 없는데도 꿈을 믿고 전진했던 사람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재능, 그리고 꿈을 위해 누군가를 포기할 만한 판단 뿐이었습니다.

은재에겐 있었고, 영현에겐 없던 것. 그 차이가 10년의 공백을 만든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에서 죽음이란 완전한 소멸이 아닌 부재를 뜻한다. 다시 만날 일 없거나 절대 돌아오지 않거나 완전히 떠난 사람은 죽지 않아도 죽은 사람이다.*
*김민재, 죽고 싶다는 말은 간절히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은재가 떠난 뒤 홀로 남은 영현에게 은재는 죽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버림 받는 쪽이었던 그에게 있어 떠난 사람은 죽음 보다 더한 외로움을 만들어냈으니까요.

그렇기에 영현은 첫사랑이 죽었다는 말로 은재를 지워야 했고, 은재 또한 영현의 외로움을 발판 삼아 고독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증오는 언제나 사랑과 맞닿은 부분이 있어서 애증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그 끝엔 상대에 대한 섭섭함이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영현이 한 것은 실상 증오가 아닌 사랑이었고, 은재는 영현의 농축된 섭섭함을 천천히 풀기만 하면 됐어요. 조금 더 대담했다면, 싹둑 잘라 단번에 다가섰겠지만요.

저는 이미 지나간 것을, 사람이든 사랑이든 사물이든, 돌아보는 사람이 좋습니다. 오래 전 싸워서 멀어진 친구와 우연히 재회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만 할까요?

단언컨대 한 번 쯤은 그 친구와 보낸 반짝이던 시간을 떠올릴 것입니다. 찰나 추억하고 지나치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변치 않으니까요.

추억에 젖는다고 하죠. 영현과 은재의 사랑은 그랬습니다. 세상이 전부 내게 등 돌린 것만 같고, 내 편이라곤 아무도 없는 거 같을 때, 단 한 명의 친구와의 영원한 우정을 맹세할 때, 그건 반드시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하여도.
IMG_0669.JPG